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2-07-07 14:44

  • 오피니언 > 사설&칼럼

(김용필/ 역사칼럼) 전투작전권 “임진왜란은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

기사입력 2022-04-29 13:50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1. 임진왜란이 아니고 임진왜전이 맞다.
 

김용필 소설가

명나라를 칠 테니 조선의 임금은 정명가도를 빌려달라. 임진년 전쟁을 왜란이라고 하는 이유였다. 분명히 임진왜란은 왜와 명나라 간의 전쟁인데 조선은 대리전으로 희생만 당한 수치스러운 역사였다. 왜가 명나라에 선전 포고하고 명이 종결지은 전쟁이다. 그러나 피해는 온통 조선이 받았다. 그들 전쟁에 조선군은 전투작전권이 없는 상태에서 의용군이 되었다.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고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이었다.
 

‘조선은 나서지 말라, 모든 전쟁 작전권은 명나라에 있다.’
 

전투작전권이 없는 상태에서 조선군은 무력했다. 어쩔수 없이 의병이 활전을 치뤘던 불행한 전쟁이었다. 조선의 영토가 침략을 받았는데 조선군은 전투작전권이 없는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수많은 백성이 희생당하였다.

 

  2. 전투작전권이 없는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1952년 1월 일본의 풍신수길은 조선에 피해를 주지 않고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열어 달라고 하였다. (대명치벌로) 조선이 응하지 않자 1592년 4월 일본은 10만 대군으로 부산 동래를 침범하여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60일 만에 평양을 점령하였다. 선조 왕은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을 가고 무주공산이 된 국토는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뒤늦게 명나라는 진압병력을 보내 일본과 싸웠으나 진척이 없는 지루한 전투를 하였고 조선군만 희생을 당했다. 명나라 심유경이 중재한 휴전협정을 제의했고 일본은 조선 3도를 이양받는 조건으로 휴전협정을 맺었다.

 

  3. 조선을 배제한 명과 왜의 휴전협정
 

명과 왜가 조선을 배제하고 휴전협정을 처결하였다. 조선을 배제한 것은 전투 작전 통제권이 명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1593년 5월 중순에 명나라 전권대사 심유경이 나고야로 가서 히데요시의 전권대사 고니시와 휴전 협상을 논의하여 7가지 항목으로 휴전협정을 맺었다.
 

(내용)- 명나라 황제의 공주를 일본 국왕의 후비로 삼고, 명나라와 일본 간의 무역 관선과 상선을 왕래하며, 두 나라 간의 전권대신이 통교하며, 조선의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며,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일본에 볼모로 보내고, 조선은 전투를 중단할 것과 조선의 3도를 이양한다는 조건으로 협정을 맺었다.-
 

무자비한 휴전 협정으로 전투는 중단되었으나 조선의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으나 손끝 하나 댈 수가 없었다. 명나라 사령관의 지시 없이는 축성도 재건도 어떤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4. 휴전 중에 전라좌수영 코 밑에서 왜성을 쌓다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하면서 남해안 10개 장소에 주둔 사령부를 마련하였다. 사천. 남해. 순천. 웅천, 울산, 동래, 다대포, 거제, 충무, 고성에 왜성을 축성하여 일본군의 군량미와 전투무기, 지원 보충병이 머무는 병참기지를 만들었다.
 

휴전으로 인하여 모든 왜성이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동래 왜성과 순천 왜성은 휴전 중에도 계속 축성과 장비를 보완하는 전투 준비를 하였다. 순천 왜성은 10만 병력이 주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그런데 문제는 전라좌수영의 코밑에서 휴전 중에 성을 쌓았다. 왜성 진입 해로엔 전라 좌수영 본영이 있었고 남해에 경상우수영 분소가 있었으나 말 한마디 못했다. 조선군이 일본이 전투 준비를 하는 것을 번연히 보면서 전투 작전 지휘권이 없었기 때문에 중단을 시키지 못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전작권이 없음을 통탄하였다.

 

  5. 정유재란의 명분과 재발
 

조선 8도 중에서 4도는 명나라가 점령하고 하4도는 왜가 점령한다는 강화조약이 결렬되자 일본은 휴전 6년 만에 1597년 1월,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3남을 차지하기 위한 재차 침략을 하였다. 정유재란이었다. 7월에 일본은 고바야가와가 총사령관으로, 우군대장 모리, 가토, 구로다와 좌군대장 우키다, 고니시, 마즈 가 총공격을 감행했다. 좌군은 남해· 사천· 고성· 하동· 광양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명나라도 직각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 양호를 경리 조선 군무로 총병관 마귀를 제독으로 5만 5천 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마귀는 동군, 유정은 서군 사령관으로 왜군과 격돌하였다.
 

결과 일본 우군은 동래성으로 후퇴하여 일본으로 퇴각하였으나 좌로군 6만 명은 순천 왜성으로 후퇴하여 집결하였다. 명나라 육군 5만과 수군 1만이 순천왜성에 일본군 6만을 가두고 대치하였다. 그런데 유정은 전투를 미루었다.

 

  6. 임진왜란의 종결권은 명나라에 있었다.
 

임진왜란은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인데 조선만 희생당했는데 휴전과 종결은 명나라와 일본이 협약이었다. 명나라 사령관 유정은 8월 한성을 수복하고 왜군을 공격하였다. 서로군 6만명은 순천 왜성에 집결하여 퇴로를 찾고 있었다. 9월 19일 유정 사령관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 군사를 포함, 약 3만 6천여 명의 병력으로 순천 왜성에 집결하였다.
 

수군은 1598년 7월 고금도에서 명나라 제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과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러나 공격하면 점령할 수 있는데 명나라군은 공격하지 않았다.
 

“장군 왜 공격을 안 하는 것입니까?” 권율이 질의하였다.

“이긴 전쟁이다.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그럼 조선군만이라도 공격을 하겠습니다.”

“뭐라, 작전권은 내게 있다. 네놈이 감히......”


전투를 종용하자 유정은 권율에게 곤장을 쳤다. 그런 중에 유정은 뒤로 왜장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었다.
 

“전쟁은 끝났다. 일본군이 돌아가게 퇴로를 열라.”

“그럴수는 없습니다. 왜적을 보내선 안 됩니다.” 명나라 등자룡 장군과 이순신 장군이 반기를 들었다. 그리고 명령을 불복하고 전투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누가 장군을 죽였는가. 왜군인가 명나라군인가.......그리고 일본군은 무사히 퇴각하였다. 노량해전의 비사다. 전투 아닌 전투였고 왜군의 퇴로를 열어 도망가도록 도와준 전쟁이었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의 장례를 거대하게 치러주었다.
 

전쟁은 7년만에 명나라의 승리로 끝나고 조선은 처참하게 폐허가 되었다. 3남도의 백성 2/3가 죽었다. 그러나 전후 명나라는 일본이 자극이 두려워서 절대 축성을 못 하게 하였다. 작전 명령권이 없는 조선군의 비극이었다. 이제 왜란이 아닌 침략전쟁이라고 해야 한다.*

 

새 희망을 열어가는 여수인터넷뉴스

기사제보/취재요청 061) 691-7500

여수인터넷뉴스 (hm7737@hanmail.net)

댓글0

스팸방지코드
0/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