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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1-12-0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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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필/ 역사추적 表忠의 고장여수-3) “4충 장군과 4충 의승병장”

(4충장군-정철, 정춘, 정린, 정대수, 4충의승병장-자운대사, 기암대사, 삼혜스님, 의능스님)

기사입력 2021-10-0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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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충 장군의 表忠
 

▲ 소설가 : (米岡) 김용필

임진왜란 때 여수 고음천(웅천)의 창원 정씨가문 출신 4장수가 구국의 선봉에서 왜적을 막다가 거룩한 전사를 하였다. 훗날 공적명은 충절공 정철(丁澈) 충의공 정춘(丁春), 충숙공 정린(丁璘) 형제와 조카 충정공 정대수(丁大秀)를 두고 이른 말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여수 출신 4장수는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아 함선의 선봉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대수는 이순신 장군의 호위 무장으로 장군의 신변을 보호하였고 이순신 장군의 모친과 부인을 자기 집으로 모셔서 장군이 편안하게 군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숙부 정철은 전라좌수영 성곽 수문지기로 시작하여 출전 중에 죽음을 맞았고 정춘은 궁도의 대가로 달리는 배에서 적선에 화궁을 날려 적선을 불태웠던 명궁장이었고 정린은 배를 젓는 수부장으로 거북선과 판옥선의 수부를 이끈 장수였다. 특히 정대수는 이순신을 보필하면서 해상전에 뛰어난 전술가였다. 그런데 정씨 4장수가 모두 전투 중에 죽음을 맞았다. 이순신은 이들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후세에 전하라 일렀다.

 

  . 이순신 장군의 모친과 부인을 모신 정대수 장군 종가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 변씨와 부인 방씨를 여수로 모셨으나 기거할 곳이 없었다. 이때 신임장수 정대수가 장군께 아뢰었다.

“대장군님, 전 이 고장 출신 신임장수입니다. 장군님의 자당님과 부인을 저의 집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뭐라, 자네가 내 어머니와 처를 자네 집으로 모시겠다고.......”

“네. 저의 집은 누추하나 넓고 경치가 좋습니다. 그리고 호위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네.” 정대수 장군은 두 분을 본가 별채에 모셨다.
 

정대수 집안은 여수 고음천(웅천)에 창원정씨의 명문가였다. 정대수는 두 분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식솔들에게 극진히 보살펴드리게 하였다. 모친과 부인은 고음천의 정씨 고택에서 실솔들의 도움을 받으며 편히 지낼 수가 있었다.
 

장군 역시 어머님과 아내가 편히 지내서 걱정 없이 군무에 열중할 수 있었다. 변씨 부인과 방 씨 부인은 정대수 본가 별채에 거하며 동네 아낙들과 격 없이 지냈다. 사대부 부인이지만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 갯벌에 나가서 손수 해물을 채취해서 동내 아낙들과 나누어 먹고 어울려 소탈하게 지냈다. 어려워도 도움을 받지 않고 오직 나라에서 주는 곡물만으로 살았다.

 

  .이순신의 부인 방씨는 궁술 무인이었다.
 

장군의 아내 방씨는 전남 보성이 친정이었다. 그녀의 부친 방진은 보성군수로 있을 때 초급장교 이순신에게 검술을 가르친 분이었다. 이순신은 궁술과 검술을 장인에게서 배웠다. 아내 역시 무술의 대가였다. 결혼 전 방씨는 이순신의 무술 연습 상대였다. 늘 같이 무술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부인은 활 잘 쏘는 궁술 대가였다. 이순신은 방씨와 무술을 익히며 친해졌다.

결혼해서도 그녀는 늘 집안에 장검을 감춰두고 시어머닐 보필하며 수시로 검술을 익혔고 남편이 집에 오면 궁술 연습 상대가 되어 주었다. 웅천앞 바다에는 해삼과 새조개의 집산지였다. 방씨 부인은 4년 동안 고음천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늘 바다에 나가서 해삼을 잡아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이순신은 한 달에 한 번 어머닐 뵈러 와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촌부들과 동락하는 모습도 보였고 아내와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 두 분이 살던 고음천의 정대수 본가 터엔 현재 오충사란 사당을 짓고 4장군과 이순신을 모시고 있다.

 

  . 4의승병장의 表忠
 

여수 흥국사는 의승병들의 훈련소였다. 400여명이 의승병 수군들이 훈련을 받고 함선을 모는 수병으로 투입되었다. 이들은 칼을 들지 않고 병선의 노를 젓는 수부들이었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군이 전투에서 밀리지 않고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수 출신 어부 수군과 흥국사 의승병 수군들의 절절한 애국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장군은 늘 극찬하였다.


‘우리 수군엔 칼을 잘 쓰는 병사보다 노를 잘 젖는 병사가 있어서 전투에 승리를 할 수 있었다.’

400여 명의 노꾼 수군 중에 승려가 200여 명이고 200여 명은 어부들이었다.
 

흥국사에서 의승병 수군훈련을 담당한 분은 기암대사(법견)였다. 기암은 의승군 증파수급과 함선운영 작전을 펴는 역할을 하였다. 기암대사 뒤엔 서산대사와 더불어 의승군을 만든 분은 화엄사 주지승이며 8도승군도통섭을 맡은 자운대사(윤늘)가 있었다.

자운대사는 전라도 사찰의 승려 중에서 의승병을 모집하는 데 지대한 공을 들였다. 그리고 승려 무장으로 직접 전투에 투입되어 위대한 승리를 거둔 삼혜스님(김대인)이 있었다. 그는 이순신이 가장 친애하던 무장이었다. 그는 양반의 아버지와 천한 관기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대부 자식으로 절에서 자라 무장이 되었다.

구례 화엄사에서 자라 무도를 익혔으나 서자라서 등과할 수가 없었던 무장이었다. 그리고 수군의 재정과 의복을 조달해 주는 의능스님(옥형)이 있었다. 그는 좌수영 수군들이 부족한 식량과 식품을 조달하였고 수군들의 식사를 담당했던 스님이었다. 이렇게 4분의 스님들은 임진왜란 때 오직 국가를 위해 몸 바친 의승병장들이었다.

 

의병이기에 역사기록엔 없지만 흥국사 사적 보엔 크게 기록하여 전할 뿐이다. 아무튼, 4장군 4승병장은 기리 역사에 남을 여수의 표충의 의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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