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종편집일 2021-12-07 15:03

  • 오피니언 > 사설&칼럼

(김용필/ 역사추적 : 表忠의 고장 여수-2) “화형당한 동학군의 돌무덤”

‘동학 농민군이 숨은 마을에서 최후의 결전을 맞다’

기사입력 2021-09-20 15:50

페이스북으로 공유 트위터로 공유 카카오 스토리로 공유 카카오톡으로 공유 문자로 공유 밴드로 공유

   . 화형에 처한 200여명 동학군의 장수 수문리 돌무덤
 

▲ 소설가 : (米岡) 김용필

여수시 화양면 수문마을에 돌무덤군이 있다. 이 돌무덤은 동학농민군이 장수리 피우실, 피맛 고개에서 일본군과 최후 결전을 벌이던 곳에 있다.

전투에서 수많은 동학군이 죽고 남은 200명이 체포되었는데 일본군함 장과 전라 좌수사 김철규가 이들을 화형에 처해 잔골을 돌무덤으로 묻어 버렸다.

곡화목장에서 일하던 목부 동학군들이 많았다. 화형 유골이라서 신원을 구별 못 해 묻힌 채로 전해오고 있다.

 

장수리 마을은 방품림으로 유명하다. 원래 수문, 장등, 장척마을인데 동학농민군이 최후를 맞아 순절하면서 해체된 곳이다. 동학군은 숨은마을 벼랑 끝에 몰렸다. 이때 곡화 목장 목부들이 죽창을 들고 동학군을 도와 관군과 연대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최후에 화형으로 죽음을 맞은 순절의 장소이다.

우연한 일치인지 모르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무찌른 고돌산진 터가 있는 곳에서 일본군 함이 마치 복수라도 하듯 동학군을 무참하게 처형하였다. 공적을 위해 200여명의 동학군 목을 베어가고 시신은 화형시켜 묻었다. 화양면 장수 수문리(숨은 마을) 이름이 없는 동학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여수시는 이곳을 표충의 성역화 하고 그들의 유혼을 길이 보전해야 할 것이다.

 

  .동학군의 여수 전라 좌수영 공격
 

1894년 11월 동학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강한 진압으로 거의 소멸상태로 순천으로 피신하였다. 김개남과 동우인 김인배는 남은 병사 4만으로 영.호도 대접주 동학군장 이 되어 순천을 접수하고 전라좌수영 군과 맞대응하였다. 그는 순천에서 영호남 동학군을 결속하여 섬으로 들어가서 재정비를 계획하였다. 그런데 순천은 접수했으나 가장 두려운 것은 전라좌수영 군이었다. 김인배는 재결속한 동학군으로 여수 좌수영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좌수영 수사 김철규의 반격과 관군장 이규태와 곽정환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는다. 종고산 전투에서 패하고 덕양전투에서 이겼으나 율촌 전투에서 다시 패하여 화양면 장수로 옮겨 국화목장에서 군영을 재정비한다. 그런데 일본군의 맹공으로 와해 되고 말았다.

 

  .곡화목장 목부가 동학군에 가세하다.
 

고진에 있는 화양리 곡화 목장은 국영 목장이었다. 군마와 황소를 기르는 목장인데 이곳에 200여 명의 목부가 있었다. 여수 화양리 출신 동북접주 심승학이 이곳 곡화목장 목부를 설득하여 동학군에 가담시킨다. 그는 목부중에 김치홍을 군장으로 앞세워 동학군과 전투를 벌인다. 목부들은 지칠대로 지친 동학군을 돕는다. 그리고 이수희 박군하 윤경삼 황종태등 이 고장 출신이 교도를 데리고 와서 돕는다.
 

동학군이 위기에 몰렸을 때 수문리 최부자(가명 최창수)가 동학군을 돕는다. 최창수는 자기 재산을 모조리 털어 동학군에 바치고 적극적으로 돕는다. 기세를 재결집한 동학군은 다시 좌수영을 재공격하지만 밀려서 화양면 나진의 안양산에서 최후를 맞는다. 300여 명이 전투 중에 죽고 200여 명이 포로로 잡힌다. 관군은 이들을 화형으로 처형시켰다.

 

  . 이주회가 일본군함(쓰쿠바)을 몰고 동학군을 섬멸하다.
 

이주회는 병인양호(1866년) 공을 세운 명성으로 1891년 김옥균의 갑오개혁 세력들과 일본으로 가서 일본의 문물을 배운다. 그는 여수 금오도에서 한국의 남해안 어업을 독점하려고 일본의 자본가와 수산업 집산 가공공장을 만들던 중이었다. 이때 일본인 업자들이 대거 금오도에 이주하였다. 그리고 그는 금오도 개발이란 명목으로 여수의 섬 개간 계획을 세워 여수 순천 농부들을 금오도에 유입시켜 농지를 개간하고 있었다.
 

그때 동학군이 여수 순천으로 퇴각하여 머물고 있었다. 일본군은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쓰쿠바 함선에 2,000명의 군인을 싣고 여수 좌수영에 도착한다. 그때 이주회가 일본 함장 앞으로 가서 제의한다. 출세기반의 절호의 기회였다.
 

“이곳 사정은 내가 잘 압니다. 내가 동학군을 섬멸하는 선봉장이 되겠습니다.”

“네깐 놈이 뭘 안다고 나서느냐?”

“전 조선의 남해안에 일본의 수산물 집산 장을 만들고 있어서 이곳 지리를 잘 압니다. 게다가 지원 병사도 있습니다.”

“수산업 집산장을 만든다고 했느냐?”

“네. 그리고 동학군을 잡을 농민병사도 300여명 있습니다.”

“좋다. 병사를 데리고 오너라.”
 

이주회는 섬 개간 농민들을 데리고 일본군에 가담하였다. 그는 일본군의 선봉장이 되어 동학군 섬멸 작전을 벌여 안양산 전투에서 동학군을 완전 소멸시킨다. 그는 동학 군장의 목을 베어 일본 천황에게 바쳤다. 그가 동학군 섬멸에 공을 세우자 이노에 공사는 그를 군부 참판(차관)으로 등용하여 일본군의 하수인이 되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범으로 활약한다. 그 후 그는 체포되어 사형을 당한다.

 

  . 참고 : 진례성(낙포), 석보성(석창). 나진성(古津=돌산)은 여수의 본향이다.
 

잠시 여수의 역사를 되돌아본다. 돌산이란 지명은 나진을 말한다. 고려 때 여수는 여수현(석보성)과 여산현(돌산=나진성)이었다. 나진(돌산)은 좌수영 수군사령부가 있던 곳이며 다도해 섬을 아우르는 관청이었다. 나진의 좌수진을 여산의 방답진으로 옮기면서 돌산이라고 불렀고 나진은 고돌산진(고진)이라고 불렀다. 여수의 제1 본향은 통일신라 때 진례부곡(낙포)였고 고려때는 제2부 본향은 여수부곡(석창성)이었다. 조선때 내례부곡으로 본영이 옮겨가면서 재3본향(종포-현여수)이 되었다.
 

여수는 여수현과 여산현(돌산현)이 합성하여 이루어졌다. 여수현은 삼일부곡(진례.적량), 소라부곡, 율촌부곡, 내례부곡이고 여산현은 방답포, 용주포(나진)과 화정의 여러섬으로 구성되었다. 고려때 여수현과 여산현이 여수도호부가 되었을 때 관청은 석교성(석창성)이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 건국하자 여수도호부 성장 오흔인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고려에 충절을 결심하자 이성계는 오흔인 성장을 체포하고 석보성을 무자비하게 헐어버렸다. 그리고 여수를 순천 도호부에 부속시켜 버렸다.
 

여산현의 본향은 돌산진(나진)이다. 그러니까 돌산은 나진을 말한다. 그후 좌수영을 나진에서 방답진으로 옮기면서 방답진이 돌산이 되었고 나진(돌산)은 고돌산진으로 바뀌었다. (역사추적) 여수는 고려에 충절한 부곡이었다.*

 

언제나 다정한 벗 여수인터넷뉴스

시민과 함께 새로운 희망을 열어갑니다.

기사제보/취재요청 061) 691-7500

여수인터넷뉴스 (hm7737@hanmail.net)

댓글1

스팸방지코드
0/500
  • 여수지기
    2021- 09- 22 삭제

    장수리는 공정(공징이), 모래등(몰등), 자매(잘미), 수문(수문동), 장척(장자굴), 장등(진등) 7마을을 이르는 말입니다. 모래등은 실지 자매마을의 일부이다. 언젠가 부터 잘미가 장수마을인양 잘못된 지명을 쓰다 보니 행정에서도 사실인양 기록되고 이정표도 그렇게 붙여져있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는 지명은 정확히 쓰셔야 합니다. 위의 글이 역사인지 소설인지 모르지만 너무나도 많은 오류가 보입니다. 다른것은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의 고향을 잘못 알고 있어서 장수가 자매한마을인양 오도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합니다.